2025년 04월 01일 출간 | ISBN : 1192159195 | 316쪽 | 규격外

저자 : 희석 주민등록상 이름은 ‘안희석’이지만, 태어나자마자 강제로 부여받은 부계의 성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에 행정 서류가 아닌 곳에는 ‘희석’만 쓰고 있다. 신문사와 시청과 기업과 정당 등에서 글을 쓰며 생활비를 벌었고, 이제는 이 책의 발행처인 독립출판사 ‘발코니’를 운영한다. 『권력냠냠』, 『우리는 절망에 익숙해서』, 『우주 여행자를 위한 한국살이 가이드북』 등을 썼고, 『1인 출판사의 슬픔과 기쁨』, 『로컬 라이프 트렌드』 등에 공저로 참여했다. 매주 금요일 아침 8시, 이메일로 「희석된 일주일」을 발송한다.

[1. 친구 없는 사람] 수습시민 잃을 것 없는 비정상 장마와 리베라와 책갈피 무딘 칼이 되고 싶어 서늘한 여름에 볕 좋은 날에 죽음을 생각하다가 도망치듯, 더 먼 곳으로 가족이라는 덫 좁고 쫓기는 마음에 대해 여름의 기준 나의 오랜 영혼들 아버지가 죽었다, 마침내 상속을 포기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서로의 결핍이었고 아름답고 밝게 오래된 낭만과 오늘의 현실 [2. 와르르 월드] 계속, 듣고 말하기 오스트레일리아, 오스틴, 오스카 촌스럽다는 말 떠나는 사람에게 알고 나면 불편한 것들 그러지 않아도 괜찮은 일요일 당신과 같이 있고 싶지 않음 피부 가죽 너머의 세계 어떤 결심 외로운 고백은 누가 듣나 로컬이 ‘미래’라면 미래는 ‘절망’인가 쓰면 뱉는 도시 혼잣말의 도시 도망치듯 사랑을 말한다면 내일을 여는 사람들 산 자에게 도착한 오늘 없어서 죽는 계절 [3. 즐겁고 궁핍한 일] 사이드미러 정도는 살 수 있는 사람 안녕하세요, 제가 그 책 작가인데요 나는 앞으로 몇 권의 책을 만들 수 있을까 사라지지 않는 것을 만드는 일 외롭고 몽롱한 즐거움 누구에게나 ‘처음’이 있기에 모든 축제는 반드시 끝난다 베스트를 대하는 마음 예술에는 얼마의 돈이 필요한가 동네 작가 미니 북토크 발코니 세계 마감 처방전 여전히 하찮은 사람에 대해 넉넉한 마음과 넉넉하지 않은 세계 어른의 쓸모 우주 절망 냠냠

이 책은 사랑이 무엇인지 선언하지 않는다. 또한, 사랑의 행위에 대해 구구절절 나열하지도 않는다.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일평생 남자로 편히 살아온 주제에 사랑의 정의를 내리는 꼴은 같잖다. 둘째, 사랑의 행위는 글로 쓸수록 구체적인 거짓말이 된다. 이에 혹시나 타인의 사랑을 세세히 엿보고 싶었던 독자님께는 미리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
_ 5쪽, 서문

나는 스스로를 ‘수습시민’이라 여긴다. 수습사원, 수습기자, 수습디자이너 등 우리 주변엔 수많은 ‘수습’이 있다. 수습에게 주어진 과제는 기대와 평가를 충족해 조직의 온전한 구성원으로 인정받는 것. 그런 의미에서 내가 수습시민 같다고 자주 생각한다. 한국 사회가 ‘시민’으로서 갖춰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들이 내겐 없기 때문이다.
_ 15쪽, 수습시민

아버지가 죽었다, 마침내. 마침내라는 말을 덧붙였다는 이유로 나는 누군가에게 비난받을 것이다. 그러나 ‘마침내’가 아니면 이 마음을 설명할 단어가 마땅히 없다. 아버지, 아니 그저 생물학적 친부일 뿐인 그는 2024년 7월 31일 오전에 사망했다. 요양병원에 홀로 사지가 마비된 채 천장만 바라보며. 병원 측에는 이미 무연고 사망 처리 의사를 밝혀놓았다. 친부의 시신은 공영장례 과정을 거쳐 화장 후 어딘가에 안치됐다.
_ 69쪽, 아버지가 죽었다, 마침내

현실의 삶이란 이런 것이다. 소설로 쓰거나 드라마로 만들라고 해도 억지 설정이라 할 법한 일들이 살면서 가끔 일어난다. 그런데 그 일이 일어났다 해도 삶은 크게 바뀌지 않는다. 현실은 현실이라서, 각자의 삶이 바쁘기에 낭만적 사건이 일어나도 그것으로 끝일 때가 많다. (중략)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는 질문에는 대체로,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다는 답으로 증명될 때가 많다.
_ 104쪽, 오래된 낭만과 오늘의 현실

딥페이크 디지털 성폭력이 난무하는(정말로 ‘난무’가 맞다) 시대로 접어들었다. 기술 발전의 결과는 모두에게 동등하지 않다. 남성에겐 권력을, 여성에겐 폭력을 선사한다. 방송에 등장하는 여성, 소셜미디어에 등장하는 여성, 같은 학교와 같은 직장에 소속된 여성 등 폭력의 대상을 가리지 않고 딥페이크 범죄를 저지르는 남자들. 혹자는 이 남자들을 가리키며 ‘괴물’이라 부르지만, 그들은 괴물이 아니다. 그저 ‘지극히 평범한 한국 남자들’일 뿐이다.
_ 110쪽, 계속 듣고 말하기

솔직하게 말하자면 2020년대는 이성애자 한국 남성이 연애할 수 있는 최고의 시기다. 위생을 청결히 하고, 상대방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살피고, 불쾌한 언행을 삼가며, 서로의 공감대나 취향을 찾아나가는 등 사람과 사람이 가까이 교류할 때 지키는 가장 기본적인 것들만 갖춰도 ‘괜찮은 남자’로 인식될 수 있는 게 지금 아닌가? 뭘 더 할 필요도 없이 기본만 해도 칭찬받는데, 그 기본도 안 하면서 연애는 하고 싶다는 심상 자체가 기이하다.
_ 146쪽, 당신과 같이 있고 싶지 않음

몇몇 사례만 가지고 “로컬이 미래”라느니 “로컬 콘텐츠 시대”라느니 하는 말을 듣고 있으면 솔직히 기가 찬다. 로컬이 ‘미래’라면 미래는 ‘절망’이라는 건가 싶은 것이다.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로컬이 유일한 미래라거나 로컬 콘텐츠의 힘은 다양성에 있다는 등의 말을 맑은 얼굴로 외치는 학자 선생들은 어째서 죄다 ‘서울권 종합대학교 정교수’로 재직하고 있는지 신기하다. 왜 그들은 미래로, 다양성이 가득한 이곳으로 오지 않는가 묻고 싶다.
_ 172쪽, 로컬이 ‘미래’라면 미래는 ‘절망’인가

내란 우두머리 윤석열의 불법 비상계엄 소식을 눈으로 확인하던 순간은 믿지 못했다. 아마 나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랬을 것이다. 계엄의 정당성이나 사유를 면밀히 따지기 전에 현실을 감각하느라 우왕좌왕했다. 곧 현실로 받아들여야 함을 깨닫자 주변 사람들로부터 연락이 왔다. “괜찮습니까?”
_ 185쪽, 도망치듯 사랑을 말한다면

나는 ‘발코니’라는 작은 출판사를 운영한다. 발코니는 2019년에 문을 열어 지금까지 다행히도 버티는 독립출판사다. 나는 출판사 대표자이자 편집자, 북디자이너, 작가, 마케터, 경리, 대외홍보팀장 등을 혼자 맡고 있다. 여러 직책 중?가장 즐거운 쪽은 아무래도 작가, 가장 자신 없고 고된 쪽은 대표자다. 문제는 후자의 경우를 잘 해내야 내 생계가 유지된다는 점이다.
_ 212쪽, 사이드미러 정도는 살 수 있는 사람

책은 한 사람의 세계와 같다. 짤막한 한 줄이 아니라, 적어도 수십 페이지에 이르는 긴 이야기를 꾸리려면 그 사람의 세계가녹아들수밖에없다.결국,내집보다더내밀한 곳으로 타인을 초대하는 셈이다. 나도, 당신도, 모두가 각자의 초대장을 받고 각자의 세계로 들어가고 있다. 지금 이 책처럼 말이다.
_ 275쪽, 발코니 세계

“미움도 때로는 사랑이라 했던가. 그동안 쓴 글들을 가만히 읽고 있으니 존재로부터 도망치듯이 사랑을 말하던 날들이 보였다.” 이 책은 ‘선명하고 명쾌하게 쓰는 사람’, ‘혐오와 맞서며 숨을 마음이 없어 보이는 사람’ 등의 평을 독자로부터 받는 희석 작가의 산문집이다. 『우주 여행자를 위한 한국살이 가이드북』, 『우리는 절망에 익숙해서』 등을 통해 날카로운 비판을 서슴지 않던 희석 작가의 개인적 서사를 살펴볼 수 있다. [웃으면서 분노하기] 50여 편의 글로 완성된 이 책에는 세상이 규정하는 ‘온전한 시민’에서 벗어난 이야기, 차별과 혐오로 가득한 한국 사회 이야기, 독립출판사를 운영하며 먹고사는 이야기 등이 담겼다. 이 책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된다. “나를 향해 별안간 욕지거리를 내뱉는 이를 두고 “푸하하” 웃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고, 마침내 그렇게 되었다. 그러나 단단해지거나 성장한 것은 아니다. 뒤돌아서서 여러 번 곱씹고, 마트에서 장을 보다가도 혼자 속으로 저주를 내린다. 시간이 조금 지나 겨우 잊다가도 비슷한 상황을 만나면 다시 떠올린다. 그렇게 나는 용서하지 않는 사람들을 가득 안고 살아간다.”(15쪽) 작가의 전작들만 봐도 차별주의자나 혐오자들이 불편할 내용들로 가득한데, 이를 두고 무차별적으로 쏟아내는 비난을 작가는 실제로 웃으며 넘어간다. 그러나 웃는다고 해서 잊는 건 아니다. 차곡차곡 분노를 쌓으며 살아갈 뿐이다. 작가가 분노를 표출하는 대상은 주로 한국 사회다. [차별종합국가의 불법 계엄령] 어느 평일 밤, 작가는 한 독자로부터 인스타그램 메시지를 받는다. 발신자는 스스로를 외국인이라 밝히며, 오래 거주하던 한국을 떠난다고 알린다. 그러면서 작가의 전작인 『우주 여행자를 위한 한국살이 가이드북』을 통해 독자 본인이 왜 외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차별받았는지 이해하게 됐다고 말한다. 이에 작가는 이번 『도망치듯 사랑을 말한다면』에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한국은) 외국인 차별뿐만 아니라, 여성, 성소수자, 아동, 장애인 등 한국엔 다양한 차별과 혐오가 존재한다. 차별종합국가라 불러도 무방할 정도로 말이다. 메시지를 보내주신 독자님께 한국살이 종료를 축하드렸고, 고국으로 돌아가셔서 모든 일들이 잘 풀리길 진심으로 기원했다. 독자님의 한국살이가 어땠을지 나는 감히 상상할 수 없다.”(129쪽) 작가는 이번 책의 제목을 아이러니하게도 12.3 불법 비상 계엄 때 떠올렸다. 윤석열의 불법 비상 계엄을 계기로 작가는, 자신이 이 세계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었다는 걸 깨닫는다. 그동안 세상이 싫고, 사람도 싫고, 모든 것들이 환멸 난다고 말하며 글을 썼지만, 그 글 속에는 도망치듯 사랑을 말하는 자신의 모습이 있었다. 세상에 실망할 때마다 오히려 무엇을 바꿔야 하는지 적극적으로 외친 것이다. “(윤석열의 불법 계엄 이후) 나는 이 나라를 구성하는 수많은 사람, 하루하루 성실하게 자기 자리를 지키는 사람, 부당한 일을 막으려 앞뒤 안 가리고 국회로 달려간 사람, 그런 사람들과 보내는 지극히 평범한 일상을 깊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뒤늦게 깨달았다. 그런 보통의 사람들과 보통의 날들을 단 한 번의 선택으로 망치려고 든 윤석열이 너무 괘씸하고 화가 나서 울었다.”(189쪽) 결국 존재로부터 도망치듯 사랑을 말한 날들이 이 책을 만들었다. [가족이라는 덫에 대해] 작가는 이번 책에 최대한의 솔직함, 예컨대 폭력적이던 친부가 하루빨리 죽길 바라던 마음마저 거리낌 없이 담았다. ‘진실되게 쓰는 것’이 작가의 의무이자 독자에게 표현할 수 있는 감사함이기에 『도망치듯 사랑을 말한다면』에 작가가 쓸 수 있는 모든 이야기를 쏟아냈다. “미안한 말일지 모르지만, 나는 그가 병원 신세를 져야 하는 순간부터 상속포기 절차를 알아봤다. 사망하길 바랐고, 그런 순간이 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꼼꼼히 찾았다. 다시는 나와 동생의 인생에 개입되지 않길, 영원히 세상에서 사라지길 간절히 기다렸다. 그래서 최대한 빠르게 사망 신고와 함께 상속포기 서류를 준비했다.”(84쪽) 작가는 자신과 비슷한 상황에 놓인 누군가가 있다면, 이 책이 도움 되길 바란다고 말한다. 당신과 어느 정도 같은 결의 고통을 느끼는 사람이 여기에 있다고, 그러니 함께 해방되자고 외친다. “아마 선택하지 않은 가족 때문에 나처럼, 아니 나보다 더 고통스러운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 운명이라는 이름으로 멍에처럼 가슴을 옥죄는 가족들에게서 하루빨리 해방되시길 진심으로 기도한다.“(89쪽) 지금의 세상에서 산다는 것이 즐겁지 않은 사람이라면, 살아있다는 것이 자주 무력했던 사람이라면, 중심부가 아닌 주변부가 더 편한 사람이라면 『도망치듯 사랑을 말한다면』이 썩 괜찮은 책이 될 것이다. “아무도 찾지 않는 깊은 산 속에서 평생 홀로 생존하지 않는 이상 우리는 늘 서로의 파장 안에 들어와 있다. 각자의 파장과 꼭 맞는 글을 이 책에서 당신이 찾아낸다면, 책의 운명은 그것으로 충분하다. 이 책의 운명을 지금부터 당신께 맡긴다.”(1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