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계간 《시조문학》에 시조로 등단한 김민지의 시조집 [타임머신]. 《추억의 유통기한》, 《명절 증후군》, 《초가을 단풍잎 같이》, 《소나기 습격 사건》, 《디아스포라》등 다양한 작품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저자 : 김민지 경남 고성에서 태어난 김민지 시조시인은 창신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2009년 계간 《시조문학》에 시조로 등단했다. 제20회 시조문학상을 수상했으며, 소가야시조문학회 회장, 한국시조시인협회, 한국여성시조시인협회, 경남문인협회, 고성문인협회 회원이며 고성에 있는 현재 고성신문사에서 근무 중이다.

시인의 말 제1부_영혼의 집 꽃잎 민들레 영혼의 집 무지 황혼 열아홉 순정 가을 서정 연애의 감정 그대 생각 추억의 유통기한 나이 백세시대 초승달의 항로 말의 옹이 제2부_라일락이 있던 집 라일락이 있던 집 빈집 부생모육지은 사모곡 멸치국밥 약손 지한이 너에게 은혜 이순 인연 명절 증후군 당동만 미래 요양원 제3부_어느 봄날 목련꽃이 봄 여름 가을 겨울 어느 봄날 목련꽃이 벚꽃 시절 초록비 오늘 매실을 담그며 장마 소나기 초가을 단풍잎 같이 입추 춘설 제4부_달팽이가 있는 저녁 달팽이가 있는 저녁 고속철 풍경 그림자 길 설악에서 소나기 습격 사건 바닥을 칠 때는 승무 산사의 풍경 시인과 농부 종려나무 불씨 밭고랑 디아스포라 박꽃 매미 간절곶 ■해설 현대성을 향해 가는 명랑한 음표 / 이달균 시인

김민지는 10여년의 시력을 지닌 시인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생소한 시인이다. 얼굴로는 구면이지만 작품을 본 것은 처음이다. 이 말은 나의 게으름을 얘기하는 것이기도 하고 조심스럽게 살아가는 그의 문단 활동방식을 얘기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래서 훨씬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우선 내가 발견한 이 시인의 시적 미덕은 세 가지다. 첫째 자유스럽고 자연스럽다. 여러 가지 소재에 다 관심을 가지고 있고 자기 방식대로 자연스럽게 시조를 쓴다. 두 번째로 길들여지지 않은 작품의 싱싱함이 있다. 제목을 다는 것,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 등이 기성시인들과 많이 다르다. 이런 그의 개성이 긍정적으로 깊어져 간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세 번째로는 삶의 지혜가 잘 스며 있다. 이 경우 인생의 연륜이 가져다 준 선물일 것이다. 김시인의 이러한 장점들이 빛을 발한다면 그는 우리 시단의 한 개성으로 자리하리라 믿는다. -이우걸 (전 한국시조시인협회 이사장) 김민지 시인은 고성의 대표적 지역신문 <고성신문> 총무이며 <한국디카시연구소> 운영위원장으로 후덕한 살림꾼이다. 그는 고성 자스민로타리클럽 회장 등도 역임하며 지역 봉사 활동도 열심히 하였는바 고성 지역문화계에서 신망이 두텁다. 처녀시집 『타임머신』은 그간 오랜 시작의 갈무리 과정을 거쳐 군더더기 없는 정제된 작품들을 선보인다. 가족과 이웃에 대한 따뜻한 서정이 섬세하게 펼쳐지고 실존적 자아로서의 구경적 탐색도 보인다. 김민지 시인은 이번 처녀 시집 출간으로 굴곡 없는 ‘서정의 포즈’ 일단을 드러낸 셈이다. -이상옥 (시인, 창신대 명예교수) 현대성을 향해 가는 명랑한 음표(音標) 이달균 (시인) 1. 시작(詩作)은 심원의 소리를 들려주는 행위 시조인 김민지의 처녀 시조집 원고를 읽었다. 시인에게 첫 시집의 무게는 묵중하게 다가온다. 시작(詩作)은 심원의 소리를 들려주는 행위이고, 시집은 살아온 만큼의 흔적을 적나라하게 드러냄으로써 새롭게 그려갈 이정표를 엿볼 수 있게 하는 척도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지금까지 자신이 그려온 삶 속에서 심상 어느 곳에 시가 위치했는가를 알게 해주는 동시에 “왜 시인가? 왜 시인이어야 하는가?”에 대해 스스로 증명해야 하는 쉽지 않은 과제를 선택받는 일이기도 하다. 그 인장이 찬란하면 빛을 감당하기 어렵고, 미운 화인에 눈길이 가면 그 흔적을 지우기 위해 부단한 싸움을 계속 해야 한다. 지금까지의 시는 내 것이었지만 이제부터는 나를 떠난 객관적인 존재로 변환되므로 찬사와 비판에 대한 무한책임 또한 당연한 것이다. 경남 고성 지역에서 시조를 쓰고자 하는 노력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고성의 현대문학사와 시조는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6·70년대 지역문단의 어려움은 짐작되고도 남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의 고성은 시조의 고장으로 태동되고 곧바로 전성기를 구가한다. 60년대를 열면서 한국 시조사에서 걸출한 시조인으로 평가받는 서벌이 문단활동을 시작했으며, 이어서 김춘랑이 등단하였고, 70년대에도 선정주, 이문형, 정해송 등의 시조인들이 나오면서 고성 시조의 굳건한 맥은 이어졌다. 김민지 시인은 그 비옥한 자양분을 토대로 새로운 시조의 밭을 일구려 한다. 여기서 또 하나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부분이 있다. 시인은 고향에서 봉사단체를 이끄는 중추이기도 하고, 지역신문을 통해 뉴스를 생산하고 전달하는 지역문화운동가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 마디로 시에 매몰된 시인이 아니라 오늘 현재 이곳에서 부여받은 일들을 성심껏 해내면서 그 알갱이들을 채에 쳐 시를 건져내고자 노력하는 사람이다. 그런 소명을 실천하기 위해 다섯 명의 시조인과 함께 고성 시조를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 나름 부단한 노력을 했다고 한다. 물론 처음 의욕만큼의 성공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천천히 그러나 쉼 없이 그 길을 가고자 한다. 2. 단수 정형을 위한 절차탁마의 시간 때로는 형식이 시를 지배할 때가 있다. 이 시인의 경우는 그 부분에 큰 방점이 찍혀진다. 단형으로 완성할 수 있다면 굳이 연시조를 쓸 필요는 없다. 일별해 보면 전체 59작품 가운데서 2수 이상의 연시조는 13편이며 나머지 46편은 단수로 창작했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하는 말이지만 시조의 궁극은 3장 6구, 단수이다. 그러므로 기본에 주안점을 두고 창작하려는 노력은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람 없는 최고의 미덕이다. 마지막 불길을 뿜는 저녁놀을 풀어놓고 한사코 서쪽으로 기울어지는 시린 발 오늘도 잘 살았구나 목메는 빈말들 -「황혼」 전문 별들이 내려앉는 지붕도 없는 집에 늦은 봄 산벚나무는 어쩌자고 저리 환해서 천지간 기별도 없이 왔다가 가시는가 -「너에게」 전문 빛의 사제인가 어둠의 유령인가 언제나 함께 했던 그대의 발자국들 한밤 내 소리도 없이 사라졌다가 나타났다가 -「그림자」 전문 무작위로 3편의 작품을 인용해 보았다. 여기서 보면 김민지 시인은 단수 정형을 위해 절차탁마의 시간을 잘 수행해 왔다는 점이다. 신인의 경우, 구와 구, 장과 장의 매듭을 지을 때 마디를 구성하는 호흡의 미숙으로 구의 불완전성이 드러나는 경우가 더러 있다. 그러다 보면 자연 초장의 사연들이 다음 중장으로 넘어가 장과 장끼리 충돌하는 예를 종종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작품들은 그런 우를 범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구와 구, 장과 장을 연결 짓고 있다. 「황혼」을 살펴보면, 초장에서 무심한 듯 노을 최후의 숨결을 툭! 던져놓고, 중장에선 안간힘을 다해 보지만 기울 수밖에 없는 사연을 풀어놓는다. 그리고 종장에선 그 또한 순명임을 느끼면서 안타깝지만 “오늘도 잘 살았구나”하며 자신을 위무하듯 끝을 맺는다. 이는 던지고(초장), 풀고(중장), 맺는(종장) 시조의 전형성을 잘 드러내고 있다. 「너에게」 역시도 잠시잠깐 곁눈질하는 사이에 꽃피우고 떠나는 산벚나무의 생태를 3장 6구 속에 아련히 그려낸다. 그러면서도 종장 첫 마디 “천지간 기별도 없이”란 구절을 통해 눌러둔 비애의 심상을 슬쩍 드러냄으로써 꽃과 그리운 대상을 병치시킨다. 자칫 단순함에 그칠 뻔한 서경을 서정으로 치환시켜 여운이 남는 한 수를 완성한다. 이는 「그림자」에서도 여지없이 재현된다. 초·중장에선 그림자의 속성을 무심한 듯 얘기하지만 종장 첫 마디 “한밤 내 소리도 없이”를 통해 아침 그림자 너머의 그 무엇을 은연 중 떠올리게 하여 서정의 무게를 더한다. 이처럼 일부러 의도하지 않았지만 초·중장을 통해 던지고 풀어헤친 대상을 종장에서 와서 자연스레 결구(結句)로 맺는 충실함은 시조형식을 제대로 지켜가고자 하는 노력의 일단으로 보인다. 이런 안정감 속에서 피어나는 서정성은 독자를 시 속으로 몰입시키는 장점이 된다. 3. 은유로 정제한 비애미(悲哀美) 사람이 죽으면 28그램이 빠져나간다는데 사라진 28그램은 어디를 떠도는가 불멸의 영혼을 담은 흑백사진 달랑 한 장 -「영혼의 집」 전문 어느 날 갑자기 기억들이 사라지면 집으로 돌아갈 길 찾을 수나 있을까 떠날 때 챙기지 못한 내일이라는약속 -「미래요양원」 전문 깊은 밤 잠들지 못하는 신호등일까 몸살 앓는 어쩌면 첫사랑의 신열인가 한밤 내 뜬소문처럼 빈 가슴을 훑고 간다 나이 들면 세월이 급류를 타고 도망간다는데 윤사월 소나기처럼 억수 같은 떨림이 어쩌면 마지막으로 내게도 남았을까 제세동기로 심장을 한순간 살려내듯 반만 남은 온기를 뜨겁게 달구듯이 아침에 새날이 온 듯 다시 채워지는가 -「초승달의 항로」 전문 형식은 내용물을 담기 위한 그릇이다. 물론 그릇에 금이 갔거나 미려하지 않다면 의도와는 다르게 입맛을 충족시킬 수 없다. 그러나 그릇을 빚는 솜씨에 믿음이 간다면 음식 맛 또한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아무리 좋은 재료를 써도 재미가 없으면 그 손맛에 의문부호가 붙는다. 이 시집의 일관된 서정은 은유로 정제한 비애미(悲哀美)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비애는 영탄에 몸서리치거나 눈물을 수반하지 않는다. 그 은근함은 전편에 걸쳐 나타난다. 이런 정조는 뜬눈으로 밤을 새운, 애틋하고 달디 단 정한과는 다르다. 그렇다면 “뜬소문처럼 빈 가슴을 훑고” 가는 대상은 누구인가? 인용한 시들에서 보면 어쩌면 피붙이에게서 느끼는 숙명의 비애로 드러난다. 「영혼의 집」에서 밝힌 달랑 한 장 남은 흑백사진과 “사라진 28그램”은 누구의 것인가? 누구라고 지칭하지 않았지만 어렵지 않게 읽힌다. 「미래요양원」도 비슷한 맥락으로 이해된다. 여기서 ‘내일’은 희망의 여명과는 다르다. 어쩔 수 없이 견뎌내야 하는 아픈 오늘의 연장선상에서 맞는 예견된 내일일 뿐이다. 이와 연장선에서 만난 시 「백세시대」는 더욱 직접적이다. “살다보니 어느 사이 아무도 없다/자식들 그늘은 너무 멀어 닿지 않고/오늘도 약봉지 끼고 물밥을 밀어 넣는다//오래 사는 것이 축복인가 저주인가/마지막 이십 년은 요양원 침대라는데/두려운 마지막 소원은 자는 잠에 가는 것” 이 작품은 은유를 배제하고 곧바로 대상을 향해 간다. 그러다 보니 시적 완성도는 급격히 떨어진다. “오래 사는 것이 축복인가 저주인가”에 이르면 그동안의 인내는 무너지고 만다. 시는 늘 그렇다. 코미디언이 먼저 웃으면 관객은 웃지 않는다. 시도 그렇다. 이런 과정을 슬기롭게 건너지 못하면 공감의 폭은 줄어들고 만다. 그런 아쉬움을 뒤로 하고 다음 시 「초승달의 항로」 를 읽는다. “나이 들면 세월이 급류를 타고 도망간다는데/윤사월 소나기처럼 억수 같은 떨림이/어쩌면 마지막으로 내게도 남았을까”. 대부분의 시들이 화자를 설정하지 않았는데, 이 시는 “내게도 남았을까”하며 자신으로 설정한다. 비슷해 보이지만 다른 시들의 정조와는 다르다. 셋째 수 종장 “아침에 새날이 온 듯 다시 채워지는가”에 이르면 숙명처럼 받아들여야 하는 아픔에 머물러 있지 않고 비워졌다 채워지는 달의 항로처럼 새로운 희망을 전하고 싶어 한다. 그렇다면 이 시의 대상은 전혀 다른 누구인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채워지지 못한 빈 자리 역시 칼로 도려낼 수 없는 인연으로 읽힌다. 일반적인 비애가 아닌, 피붙이와 관련된 비애는 복합적이다. 그렇게 인식되는 작품은 1부와 2부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대충 읽어봐도 「그대 생각」, 「추억의 유통기한」, 「라일락이 있던 집」, 「빈집」, 「부생모육지은(父生母育之恩)」, 「사모곡」, 「인연」 등 여러 군데서 나타난다. 시인도 어느덧 어머니 된 입장에서 지순한 모정의 내리사랑을 감당하기 쉽지 않다. 하지만 어쩌랴. 그 또한 벗어나야 할 것이라면 달의 항로처럼 변화하고 극복해야 할 대상이지 않을까. 4. 현대성이란 옷으로 갈아입다 봄까치꽃은 살얼음 건너서 쏜살같고 강변 생강나무는 꽃샘추위 밟고 오고 어느새 무릎 아래에서 낭창낭창한 목소리들 오래전 본 듯한 순하디 순한 눈망울이 먼 거리 파문지듯이 한지에 먹물 번지듯이 지구별 한 귀퉁이가 눈부시게 흔들리지 -「봄」 전문 먹구름 하나 가득 하늘을 덮더니 세찬 비바람이 겁도 없이 쏟아진다 간절한 소망 하나가 망망대해를 건너간다 -「간절곶」 전문 창작 연도에 대해서는 알 길 없지만, 분명 3·4부에 오면 1·2부를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이 잘 드러난다. 1·2부 전체를 적시고 있던 개인사적 비애는 극복해야 할 대상이었다. 나의 주관적 슬픔은 좀처럼 객관적인 것으로 치환되지 않는다. 공감은 그리 쉽게 얻어지지 않는다. 그런데 3·4부에서는 그런 우려가 의외로 극명히 극복되고 있다. 그 사이 간극의 이유는 모르지만 시는 한결 편안하게 읽힌다. 시적 완성도 역시 이와 비례한다. 「봄」은 데자뷰처럼 “순하디 순한 눈망울”을 하고, “지구별 한 귀퉁이”를 “눈부시게 흔”든다. 봄의 환희는 비애를 벗어던지고 가볍게 연둣빛 경쾌함으로 다가온다. 「간절곶」에 오면 시의 본령인 언어유희를 동반하는 여유를 보인다. 동해안 간절곶은 동해안에 돌출된 암석해안이다. 간절곶이란 이름은 “먼 바다에서 이곳을 바라보면 대나무로 만든 긴 간짓대처럼 보인다 하여 붙여졌다.”고 한다. 그러므로 여기서 ‘간절함’과 ‘간절곶’은 전혀 연관이 없다. 그런대도 이 두 단어는 절묘하게 조화된다. 갑작스럽게 간절곶 하늘을 덮는 구름이 비를 쏟아 내린다. 가까이에서 시작된 장대비는 수평선 향해 맹렬히 달려간다. 망망대해를 향한 그 맹렬함은 간절한 소망처럼 거침없다. 동해에서 만난 비는 소망을 간직한 시인의 것과 동일시된다. 그 대상과의 일치는 독자에게 카타르시스를 안겨준다. 이런 ‘통通함’은 1·2부에서 느낄 수 없는 자연스러움이기에 시 읽는 맛을 한결 살려준다. 느닷없는 소나기가 도로를 질주한다 혼비백산 흩어지는 사람들, 그림자들 다급한 목소리만이 젖지 않고 명랑하다 -「소나기 습격 사건」 전문 빗물이 마른 나무를 계속해서 찌른다 봄날의 저격수인가 꽃들의 수혈인가 세상이 폭탄 터지듯 온통 붉다, 온통 저리다 뼈 없는 마음으로, 가장 느린 걸음으로 속내를 감추고, 울음도 감추고 정처는 동가식서가숙 홀가분하겠네 쓸쓸하겠네 -「달팽이가 있는 저녁」 전문 간절곶에서 시작된 소나기는 느닷없이 도심 하늘로 건너와 거리를 때린다. 모두가 젖는다. 아무도 피할 재간이 없다. 하지만 그 비는 왠지 모를 음습함과는 전혀 다르다. 눅눅한 비애를 동반하지도 않는다. 스타카토로 건너오는 피아노 음률처럼 명랑한 음표를 그려낸다. 그래서 「소나기 습격 사건」이란 세련된 옷으로 갈아입는다. 이것이 바로 현대성이다. 물론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처절함이 현대성과 배치된다는 것이 아니다. 처절함 속에 나를 가두어 처절함의 절대치를 보여줄 때 비로소 좋은 시는 완성된다. 그러나 그런 경험은 쉽게 얻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어떤 대상을 객관적인 상관물로 보여줄 때 더욱 극명해 지는 것이다. 이제 비는 더 이상 우울함의 상징이 아니다. 질주하는 차들과 황급히 피하는 사람들과 같은 음계를 가진다. 「달팽이가 있는 저녁」의 상상력은 충분히 재미있다. 어느 비 오는 저녁, 달팽이는 나무에게 신선한 피를 수혈하는 저녁을 보고 있다. 비가 내리는 것이 아니라 주사 바늘로 마른 가지를 찌르듯 내린다고 말한다. 시인은 건조해진 겨울 나목에 수액을 공급하기 위해서는 뿌리의 삼투압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느낀다. 봄날의 비는 “꽃들의 수혈”로 표현된다. 그러므로 투명한 빛깔의 비는 온통 붉음으로 그려진다. 이런 봄날을 달팽이가 가고 있다. 그 느긋한 걸음으로 인해 마음에도 뼈가 없다. 울음도 기쁨도 다 게워낸 봄날 오후, “동가식서가숙”하며 통달한 듯 세상을 건너간다. 그 모습은 홀가분함인 동시에 조금은 쓸쓸함으로 나타난다. 신선하다. 이 신선함은 현대시조가 지향하는 현대성이다. 시조는 700년의 전통 위에 서 있다. 하지만 그 전통이 현대를 담아내지 못하면 진정한 전통이라 보기 어렵다. 계승은 답습이 아니다. 조선조에는 조선조 다운 것에 충실해야 하고, 현재는 현재의 것에 충실해야 진정한 전통이 계승된다. 그러므로 현대적인 노력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현대의 독자가 없는 시조라면 이미 그 생명은 다한 것이다. 시조인이라면 누구든 그 명제에 충실해야 할 의무가 있다. 5. 과제, 무엇으로 시조를 윤택하게 할 것인가? 고성 역사의 근원을 찾아가면 가야의 한 왕국이었던 소가야에 닿는다. 소가야는 변진고자미동국을 토대로 발전했다. 그 오롯한 역사와 고성문학이 무관치 않으리라 싶다. 그 길을 먼저 걸어간 6·70년대 선배 시조인들의 길은 물론이거니와 역사의 시계를 조금 더 과거로 돌리면 도산서원·갈천서원·곤의서원·유촌서원·위계서원·도연서원 등 유학문화재도 많다. 공룡발자국으로 대표되는 백악기의 역사도 오롯이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김민지 시인은 지금까지 여기서 살고 생각하는 시조인이고 싶어 한다. 누구보다 지역의 것에 대한 애정도 많다. 그것은 피해가지 못할 즐거운 시인의 운명이다. 그동안 다양한 변모를 통해 시의 길을 다듬어 왔다. 그 습작의 결과물을 이번 첫 시집에 담아낸다. 어차피 첫술에 배부를 순 없다. 고성항을 떠난 배는 나의 뜻과는 상관없이 파도에 휩쓸리기도 한다. 그런 과정을 겪은 후에라야 기항지에 닿을 수 있다. 지금까지는 “시조는 무엇인가?”하는 명제를 놓고 씨름했다면 이제부터는 “무엇으로 시조를 윤택하게 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시인이기를 바란다. 다행이도 고성은 수많은 유산을 간직한 고장이다. 더 이상 책 속의 유산으로 존재하게 내버려 두지 말고 작품 속에서 새롭게 되살려 내는 노력을 해 준다면 훌쩍 커버린 시인을 만나게 될 것이다. 이제 시작이다. 그런 고민이 잘 집적된 제 2시집을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