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기다림이 끝날 무렵 비로소 붓을 들 수 있는 글 수필의 사전적 정의는 ‘자신의 경험이나 느낌을 일정한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기술한 산문 형식의 글’이다. 생각나는 대로 붓 가는 대로 써내려가는 것이 수필이지만, 글쓰기는 무척 힘든 고행이다. 글쓰기를 펜촉에 자신의 피를 찍어서 한 글자 한 글자 정성을 다하는 수행이라고 했던 어떤 작가의 말도 그러한 의미일 게다. 『수필을 위한 반성문』은 오랫동안 대학에서 학생들을 지도해 온 저자의 수필집이다. 글쓰기의 이론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저자도 글쓰기의 어려움에 대해서만큼은 예외가 아니었다는 진솔한 고백이 담긴 책이다. 타인에게 스스로를 드러낸다는 건 확고한 자기 신념뿐만 아니라 겸허한 마음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평생 글과 함께 살아왔음에도 늘 허전함이 있었던 저자는 이 수필집에서 자신의 글과 삶이 숙성되어가는 과정을 절제된 문체로 담담히 전하고 있다.

저자 : 이대범 강원대학교 교수, 춘천국제고음악제 이사장, 갤러리 4F ‘뮤지컬 시티’ 시민강좌 책임자 등을 역임했다. 현재는 영화 매체를 활용한 교육프로그램을 개발하면서 소외 계층을 위한 인문학 실천 운동을 하고 있다. 저서로는 『한국연극 바로보기』, 『한국의 전통극과 현대극』, 『한국근대희곡론』, 『스토리텔링』(공저), 『디지털 스토리텔링』(공저), 『인문학 말하기와 글쓰기』(공저), 『21세기 인문학, 치료를 논하다』(공저) 등과 수필집 『방동리별곡』을 썼으며 현재도 인문치료 관련 글들을 쓰고 있다.

서문 수필은 아무나 쓰는 글이 아니다 제1부 수필을 위한 반성문 수필을 위한 반성문 1 웃기는 짬뽕 아버지의 연설 수필을 위한 반성문 2 이제는 죽어도 좋아 제2부 모색의 여정 어느 ‘보통사람’의 죽음 곡부에서 ‘캐세끼’ 되다 아듀, 힐링! 에포닌을 위한 변명 편편상(片片想)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인생의 커튼콜’을 생각하다 타클라마칸 단상 장인의 집 단장 강원도가 좋다 애완동물의 고향살이를 허(許)하라 제3부 수필의 경계를 넘어 밥상머리 교육 유감 코로나 19 사태와 공연 예술의 생존법 예루살렘 광기 찰리 채플린의 연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글을 쓰기가 더 어려워졌다. 고해하는 심정으로 수필을 다시 생각했다. 부단한 자기 성찰과 대상을 숙고하는 자세가 요구되는 글, 숙성된 지혜 없이 글재주만으로는 쓸 수 없는 글, 짜내서 쓰는 글이 아니라 사유가 흘러넘쳐 여백을 조용히 채우는 글이 수필임을 알았다. 또 기다림이 끝날 무렵 비로소 붓을 들 수 있는 글이 수필임을 알았다.
- 서문: 수필은 아무나 쓰는 글이 아니다

‘웃기는 짬뽕’이란 말의 사용은 이런 식이다. 상대하기 싫을 때, 면전에서는 자신이 없어서 돌아서서, 바른 소리 하면 찍힐까 두려워서, 막연한 대상에게 공연한 한풀이 할 때 혼잣말로 하는 말이 ‘웃기는 짬뽕’이다. 이제 나는 ‘웃기는 짬뽕’이라는 말 속에 숨어 있는 냉소적은 표정을 걷어내려고 한다. 공연히 돌아서서 속 끓이지 않고 떳떳하게 할 말은 하고 살 작정이다. 되는 것은 되고, 안 되는 것은 안 된다고 말하며 살 생각이다. 남에게도, 또 나에게도.
- 웃기는 짬뽕

내가 원망하던 아버지의 면면들이 내 삶에 어른거리고 있는 것을 확인하면서 흠칫 놀란다. 차츰 말에 힘이 사라져 가는 것도 아버지를 닮았다. 후배들과 함께하는 술자리에서의 내 말발은 예전과 같지 않다. 화제도 차츰 책을 떠나 막연한 대상에 대한 원망과 독설로 변해갔다. 말이 힘을 잃으니 대우 또한 말이 아니다. 눈치 빠른 친구들은 화장실 가는 체하며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공허한 가슴을 수습하여 자리를 털고 일어날 때는 끝까지 자리를 함께 해준 녀석들이 고마워 눈물이 날 지경이다.
- 아버지의 연설

붓에 나를 맡길 수 있어야 비로소 수필이 될 터인데, 종심(從心)에 준하는 연륜이 없고서는 좋은 수필을 쓸 수는 없는 노릇이다. (…) 수필은 기다림이 끝날 무렵 비로소 붓을 들 수 있는 글이다. 조급하게 서둔다고 쓸 수 있는 글이 아니다. 글쓰기의 가위눌림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그저 넘칠 때까지 채우는 것뿐이다. 독서든, 사색이든, 무엇으로든 채우고 사유가 스스로 길을 낼 때까지 기다려야 쓸 수 있는 글이 수필이다.
- 수필을 위한 반성문 2

힐링을 제대로 하자면 질병을 알아야 한다. 질병을 알기 위해서는 질병과 마주 서야 한다. 최근의 힐링 담론을 들여다보면 질병의 원인은 외면한 채 치유 효과를 끌어내기에 급급해하며 허둥대는 것이 수상쩍다. 치유라는 화두에 집착하다 보면 정작 치유의 표적인 질병에는 소홀하기 십상이다. 지금 우리 사회가 왜 치유가 필요한지에 대한 문제의식 없이 제대로 된 치유를 기대하는 것은 공허하다. (…) 위로하며 잊으라고 망각을 권유하는 치유 담론은 가짜다. 슬픔은 슬픔대로 기쁨은 기쁨대로 간직하는 삶, 슬픔을 망각하기보다는 슬픔이 무르익은 그곳에서 새로운 모색을 하는 삶이 진격한 삶이다. (…) 고통을 저작(詛嚼)하며 근본에 즉(卽)하는 것이 진정한 치유다.
- 아듀, 힐링!